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계 러시아인 (문단 편집) ==== 볼가 독일인 ==== 18세기 초 카스피해 북부 볼가강 하류지역을 방문한 영국인 기록자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자 몽골계 유목민인 [[칼미크인]]들이 "농사를 지어야 하는 땅에 유목을 해서 생산성이 낮다."면서, 해당 지역의 광활한 땅은 “잉글랜드에서는 엄청난 가치가 있을 테지만, 여기서는 버려져 경작되지 않는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해당 기록에 대한 보고가 예카테리나 대제 귀에 들어가자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영내의 칼미크인들에게 과도한 군역을 부과해서 유목을 방해한 후 칼미크인들의 땅에 조금씩 [[코사크]]들을 침투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코사크들에 뒤이어 독일계 이주민들이 따라와서 과거 칼미크인들의 영토에서 마을을 건설하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 1762년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나 2세]]는 유럽으로부터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였다. 광활한 자국의 인구밀도도 높히고 가장 주요하게는 중/서유럽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농업 생산력을 제고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때 가장 많이 이주한 사람들이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지역의 빈농들이었다. 이때 이주 장려 정책에 의해 이민 온 독일인들은 [[볼가강]] 유역(現 [[볼고그라드]] 인근)에 많이 정착했는데, 이들을 '볼가 독일인([[독일어]]: Wolgadeutsche, [[러시아어]]: Поволжские немцы)'이라고 부른다. 당시 서유럽의 빈농들이 신대륙으로 많이 가던 시절, 독일인 농민들은 미지의 신대륙 서부개척보다는 거리적으로 인접한 러시아 제국의 비옥한 평원지대로 이주를 택한 것이다. 18세기 내내 꾸준히 이민이 이루어져 1897년 기준으로 [[볼가강]] 하류 지역에 사는 독일인의 수는 179만 명에 달했다. 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예카테리나 2세는 칙령을 통해서 그들에게 여러가지 파격적인 특혜를 주게 되는데, 독일인들의 언어, 문화, 자치공동체를 보존과 더불어 '''종교의 자유'''와 '''징집(병역) 면제'''(이민 1세대는 물론 그 후손들까지)를 이주 혜택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파일:German Mennonite Family in south Russia region.jpg]] * 러시아 남부의 재세례파 독일인 가정. 초창기 이주민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출산율이 높은 편이라 인구가 금세 증가했다고 한다. 이주민들의 고향과 종교는 다양했는데, 독일 남부 [[바이에른]] 출신들은 [[가톨릭]], 그 외 다른 지방 출신들은 [[루터교회|루터파 개신교]]를 믿거나, [[재침례파#s-3.2|메노파]](Mennoniten)라고 불리우는 재세례파의 일파도 많았다. 메노파는 비폭력 평화주의(징집거부 포함)이 중요한 교리 중 하나이다. 이들의 고향 프로이센에서는 메노파 신도들에게 명목상 징집 면제를 해주는 대신, 높은 세금을 때림과 동시에 군복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이 새로 토지를 구입하는 것을 불허했기 때문에 많은 메노파 신도들이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 결과 러시아로 이주를 행한 것이었다. 러시아로의 대이주 이후 자신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한동안 잘 살던 이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러시아의 정책이 점점 자신들에 대한 특권을 줄여나가는 것에 직면하게 된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징집 면제 특권의 폐지'''이다. 이로 인해 볼가 독일인들은 엄청난 종교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는 장교나 기병으로 근무하는 게 아닌 이상 __기한 없이__ 말단 보병으로 복무해야 했다.[* 일단 규정 상으로는 25년이었다. ~~북한도 25년 동안 사람을 가두어 두지는 않는다~~ 다만 '규정 상'이라는 말에서 보이듯 이 기한이 지켜지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 때나 지금이나 러시아 군대라는 곳이 인명 경시 사상이 강하다 보니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제정 러시아 시절 징병제란 추첨을 통해 여러 집 중 한 집의 입영 대상자가 입대하는 식이었기에 재수 없게 당첨이 되면 일단 해당 집에서는 장례식부터 치를 정도였다.] 이들은 운이 나쁘면 말 그대로 늙어 죽을 때까지 말단 사병으로 복무할 가능성도 있었으며, 물론 병영에 재세례파를 위한 교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이는 다른 개신교 교파나 가톨릭을 믿는 볼가 독일인 농민들에게도 마찬가지…] 즉 이들에게 병역 의무를 지우는 건 징병당한 사람에게 가족과의 생이별과 배교를 동시에 강요하는 셈이었고, 아무도 징병되지 않으려고 했으니 정부와 큰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많은 볼가 독일인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무렵 다시 러시아를 떠나게 된다. 그들이 다시 떠나기로 한 곳은 다름 아닌 신대륙.[* 개신교도들의 대다수는 미국으로 가 독일계 미국인이 되었다.] 이주민들은 러시아에서 떠나게 된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종교문제였기 때문에 새로운 이주 대상국을 택하는 것도 주로 종교에 따라 이루어지게 된다. 남부독일 바이에른 출신의 가톨릭 이민자들은 주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로 갔다.[* [[독일계 브라질인]], [[독일계 아르헨티나인]] 문서 참조.] [[루터교회|루터파]]나 메노파 등 개신교 계통 이민자들은 북미로 떠났다. 북미로 간 이민자들은 자신들이 아는 한지/건조형 농업에 맞는 [[미국]] 대평원 북부쪽에 정착하게 되는데, 제일 많이 간 곳이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이고, 그 다음이 [[네브라스카]] 와 [[캔사스]] 등이다. 또한 주변 [[미네소타]]와 [[미시건]] 등에도 많이 정착했다. [[캐나다]]로 이민간 사람들은 [[알버타]]주, [[매니토바]]주, [[서스캐처원]] 등에 정착했다. 이들 미국으로 이주한 볼가 독일인들은 [[독일계 미국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미국으로 이주해서도 대다수는 '볼가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다.[* 다만 루터파를 믿는 볼가 독일인들은 훗날 다른 독일계나 스웨덴 등 북구계 이민자, 혹은 핀란드계 이민자 등과 통혼하여 정체성이 희석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북미로 이주한 볼가 독일인 중에 메노파들은 또 다시 징집문제로 시련을 겪기도 했다. 이로 인해 징집 거부로 감옥에 가는 경우도 많았다. 후술한 것처럼 국외가 아니라 [[알타이 지방]] 등으로 재정착한 재세례파 신자들도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Mennonite_settlements_of_Altai|참조]].] 한편 겨우 정착한 러시아에서 다시 떠나기가 뭐한 사람들은 볼가강 유역에 그대로 남았는데 곧이어 러시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다. 신생 소비에트 정부는 독일계 이민자들이 사는 곳에 [[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워주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해 주기도 했는데, [[국가무신론]]을 표방한 소련의 정책으로 기독교 성직자들은 [[시베리아]] [[굴라크|수용소]]로 보내지는 등의 고난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1921~22년 소련에 대기근이 닥쳐 식량이 부족하자 볼가강 유역의 [[타타르스탄]]부터 먼저 식량 공급을 끊는 바람에 많은 볼가 독일인들과 [[볼가 타타르인]]들 사이에서 수십만명 이상의 아사자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1년 [[아돌프 히틀러|히틀러]]가 [[독소 불가침조약|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며 [[독소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볼가 독일인들에게 시련이 닥치게 된다. [[프리모리예 지방]]에 있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듯이, 이들도 똑같이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지시에 의해서 대대로 살던 고향에서 쫓겨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굴라크|노동 수용소]]로 이주당하게 된 것. 러시아 본토 내의 볼가 독일인들이 적대국인 [[나치 독일]]에 이로운 일을 할 우려가 있는 잠재적인 부역자로 몰렸던 것이다. 스탈린의 볼가 독일인 탄압은 종전 시기까지 이어졌고, 이들의 원주거지에 조성된 공동묘지의 묘비도 다 부숴서 도로포장용 돌로 쓰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스탈린 사후인 1965년이 되어서야 볼가 독일인에 대한 강제이주 정책이 공식적으로 철회됐지만, 이들은 대부분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물론 1941년까지 존재했던 그들의 자치 공화국의 부활도 불허. 이 때 고향에 못 돌아간 많은 볼가 독일인들이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에 그대로 정착해서 살게 되었다. 이 독일인들의 후손은 현재에도 많이 남아 있다. 러시아에 약 60만명의 볼가 독일인이 있으며 [[카자흐스탄]]에도 약 17만명 정도의 볼가 독일인이 살고 있다.[* 소련 붕괴 이전에는 90만여 명에 달했다.] 그 외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에도 그들의 후손이 남아있다. 타국 땅에서 서러움을 당하던 이들 중 상당수는 80년대 [[독일]] 정부에게 귀국권을 요구해서 많은 수가 독일로 이주하게 된다. 초기에는 독일 정부도 적극적으로 이들의 이주를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들이 이주한 지 너무 오랜 기간이 지나서인지 [[독일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고 문화도 달라서 독일 내에서 사회문제가 발생하자 독일 정부는 90년대부터는 이들의 귀국을 까다롭게 했다. 대신 독일 정부는 여전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내의 독일인들을 많이 지원한다. 시베리아 인근 볼가 독일인들의 자치체로는 [[알타이 지방]]의 [[https://en.wikipedia.org/wiki/Nemetsky_National_District|독일인 민족구역]]과 [[옴스크]] 주의 [[https://en.wikipedia.org/wiki/Azovsky_Nemetsky_National_District|아좁스크 독일인 민족구역]]이 있다. 다만 이들은 군(郡)급 행정구역이라 과거의 자치공화국보다는 격이 떨어진다. 한편으로 러시아에서 일부 지자체(타타르스탄 공화국) 차원에서 멕시코 매노나이트들에게 토지를 내줘가머 이주시키기도한다. 러시아라는 나라자체가 인구감소와 지방과소화를 한국보다 일찍겪은 나라인 만큼 출산율이 높은 매노나이트는 있는것이 더 나은 상황이라 그렇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